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에비 왕국 (문단 편집) === 이베리아 반도 쟁탈전 === '''[[헤르메리크]]'''는 수에비족의 왕이 된 직후 아스딩 고트족의 도전에 직면했다. 419~420년, 아스딩 고트족이 네르바스 산에서 수에비족을 포위했다. 하지만 420년 히스파니아의 사령관 마우로켈루스가 서고트족과 연합하여 반달 왕국을 압박해오자, 군데리크 왕은 아스딩 고트족에게 포위를 풀고 자신을 돕게 했다. 이리하여 아스딩 고트족이 로마-서고트 연합군에 맞서 반달군과 연합하고자 이동한 뒤, 수에비족은 헤르메리크의 지도하에 갈리시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수에비족은 갈리시아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갈리시아의 일부 지역만이 요새에 의존하여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브라카라 아우구스타(현 [[브라가]])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고, 수에비족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여기에 아스토르가와 루고 역시 귀순했고, 수에비족은 브라가, 아스토르가, 루고 시와 그 주변 마을에 주로 거주했다. 학자들은 당시 수에비족의 인구가 25,000~35,000명이며 전사는 8,000~9,000명 이하였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이시도르에 따르면, 수에비족보다 몇 배 많은 현지 로마인들은 노예 취급 받으며 비참한 삶을 연명했다고 한다. 이후 갈리시아에서 잠자코 지내던 헤르메리크는 반달족이 429년에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아프리카로 이주하자 430년부터 정복 전쟁을 단행했다. 431년 아쿠아 플라비아(현재 샤베스 시)의 주교 이사키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권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찾아가서 수에비족의 잔혹한 파괴와 약탈 행위를 설명하며 군대를 보내 이들을 막아달라고 간청했다. 아에티우스는 432년 켄소리우스를 수에비 왕국에 사절로 보내 더 이상의 적대행위를 벌이지 말라고 요구했고, 헤르메리크는 로마의 개입을 우려해 그 말에 따랐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갈리아의 분쟁에 얶매여 있던 터라 이베리아 반도 로마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헤르메리크는 휴전 협약을 깨고 주변 일대에 대한 습격을 이어갔다. 437년 켄소리우스가 다시 사절로 와서 수에비족으로부터 무력 행위를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사절이 돌아가자 재차 습격을 이어갔다. 그러다 438년 중병에 걸리자 아들 [[레칠라]]를 왕으로 옹립하고 퇴위했다. 이사키우스 주교는 441년경 헤르메리크를 여전히 왕이라고 불렀는데, 이로 볼 때 441년까지 살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